북악터널은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서 성북구 정릉동까지 북악산을 관통하는 길이 810m의 터널이다. 쌍굴로 4차선이며 서대문구 홍은동, 종로구 부암동·평창동 지역에서 성북구 정릉동, 도봉구, 동대문구 방향에 이르는 도로로써 동서 지역간의 교통소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가위때면 화려하게 씨름대회가 열렸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다. 8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씨름 경기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72년이다. 그해 9월 24일부터26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는 대한 씨름협회와 KBS가 공동주최하고 문화공보부가 후원한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 씨름대회가 열렸다. 이전까지 야외모래판에서 실시하던 것을 실내의 매트에서 하게 되었고 경기가 열리는 3일동안 KBS-TV에서 중계방송을 전국으로 실시하여 전국민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경기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대회는 체급에 관계없이 출전하여 토너먼트 예선전을 거쳐 8명이 리그전 형식으로 최종결승을 치뤘다. 씨름단이 잇달아 해체되고 유망선수들이 방송이나 종합격투기등으로 진출하며 침체기를 맞은 지금의 씨름계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70년대까지 자격증의 대명사였던 주산 부기 타자… 자격증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재발급을 해주고 있는데 당시 상고생들에게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경기도 양주는 경기도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건국 1392년 태동하여 양주도호부·양주군이었던 지역으로 625년의 역사를 가졌다. 수도권의 도시화로 행정구역의 잦은 변화를 겪어왔다. 1963년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고, 1980년에는 2개읍 6개면 일대를 남양주군으로 신설하여 분리했다. 1981년에는 동두천읍도 시로 승격·분리되었다. 2003년 양주시로 승격되었다. 1951년 초가집만 보이던 경기도 양주는 2020년 현재 인구 23만, 재정규모 9,561억의 도시가 되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김영주 조선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을 동시에 발표했던 성명이다. 중상비방 및 무장도발 금지, 남북적십자회담 실시를 위한 적극협조, 서울과 평양 간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의 합의사항도 포함되었다. 공동 성명의 발표 배경은 국제적인 화해 분위기와 국내의 정권 안정 및 명분 추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성명은 통일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 없이 정부 당국자들 간의 밀담을 통해 처리되었다는 한계성과 통일 논의를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빛을 잃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고속국도 제1호선이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인 1968년 2월 1일에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에 완공되었으며, 1971년 8월 31일에 노선이름이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로 지정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할 당시의 기점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이고 종점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이었으나, 2002년 5월 1일에 변경된 노선체계에 따라 기점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구서 인터체인지)이고 종점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으로 변경되었다. 수도권과 영남지방을 이으며, 인천과 부산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산업대동맥 구실도 하고 있다. 또한, 서울·수원·오산·천안·대전·영동·황간·김천·구미·왜관·대구·영천·경주·언양·양산·부산 등 주요 지역을 경유하여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연결하고 있다.
경인고속도로는 고속국도 제120호선이다. 1967년 3월 24일 착공하여 1968년 12월 21일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실제 건설은 29.5㎞로 건설되었으나 1985년에 현재의 제물포길에 해당하는 서울특별시 양평·신월 구간 5.6㎞는 서울시로 이관되어 현재의 총연장은 23.9㎞이며, 기점은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이고 종점은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동이다.
동양그룹의 모기업이었던 동양시멘트는 1938년 일본 오노다 시멘트회사의 삼척공장으로 출발했다. 1945년 해방 직후 생산이 중단되었는데 1953년 7월부터 운크라(UNKRA)원조계획으로 보수공사를 했다. 1956년 동양그룹의 창업자인 이양구 회장이 삼척시멘트를 인수하여, 1957년 동양세멘트공업㈜으로 상호를 바꾸면서 연간 8만 톤의 시멘트를 생산하는 시멘트 제조 회사로 새롭게 출범했다, 1980년대 건설업계의 호황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현재는 기업회생절차를 거쳐서 레미콘과 골재, 철도건설 등 건설 기초소재 위주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삼표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되었다.
미군정하의 미곡정책이 실패하며 농가경제가 피폐되자 미군정은 미곡 등 소비재 중심의 원조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